실학의 집대성 < 정약용 선생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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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집대성 < 정약용 선생의 업적


하피첩은 글씨가 쪽마다 다양한 서체와 크기로 이뤄져 있었다. 이 밖에 한국의 역사나 지리, 국어 등 국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의학이나 농업 기술, 천문 등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한편, 예술이나 문학 등에서도 서민적 성향이 크게 발달하였다. 21세기 당파싸움에 휘말린 작금의 대한민국을 200년 전의 큰어른, 다산의 눈으로 새로이 조명하여 해법을 제시한다. SalesPoint는 판매량과 판매기간에 근거하여 해당 상품의 판매도를 산출한 알라딘만의 판매지수법입니다. G뮤지엄숍은 경기도박물관, 경기도미술관, 백남준아트센터, 실학박물관, 전곡선사박물관, 경기도어린이박물관 등 6개 뮤지엄의 편의시설 뮤지엄숍을 온라인스토어로 오픈하였습니다.

민본주의적 왕도정치 사상


그 뒤로 정약용은 기기도설이라는 책을 열심히 보았어요. 그리고 그 책에 등장하는 어떤 기구에 특별히 큰 관심을 뒀지요. NK경제는 북한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편찬한 조선대백과사전(스마트폰용) 중 '정약용'에 관한 내용을 확인했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지방관 이종영에게 주는 글을 새롭게 추가했고, 시대 변화에 맞춰 번역과 체제, 장정을 정비했다.
정약용이 예순이 되어 그의 일생을 돌아보며 직접 쓴 묘지명에서 소개한 호는 사암(俟菴)이다. 사암은 ‘초막에서 기다린다’는 뜻인데,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그의 삶과 사상을 후손이 평가해주길 기다린다는 뜻이다. 목민심서 낭독회를 비롯해 사회봉사에 힘쓴 시민들을 위한 시상식까지 열려 다산의 뜻을 되새겼습니다. 따라서 맹자의 의리지변을 분석하는 것은 맹자 사상의 핵심을 이해하는 관건적인 작업일 뿐 아니라, 유가의 도덕 선택 이론의 핵심을 이해하는 일이다. ※ gmail(지메일) 계정은 시스템상의 문제로 발송 오류가 잦으니 gmail 이외에 메일로 신청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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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1801년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인해 경상도 영일군과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유배 생활을 했는데, 실학박물관에서는 유배 당시에 정약용이 자녀들에게 썼던 편지도 볼 수 있다. 다산은 이러한 풍요로운 자연환경에서 1762년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다. 이미 7세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웠다네, 거리가 멀고 가까워서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란 시를 짓는 재능을 보였다. 16세에 성호의 글을 읽고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판 기러기아빠 정약용의 자식교육


그러면서도 선비로서의 체면을 완전히 버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산은 “과일 장사는 다른 장사보다 깨끗하고 점잖지만 어차피 장사”라면서 뽕나무를 심어서 누에치는 일은 선비의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 큰 이익도 남길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냐고 반문했다. 대통령 정약용은 벤치마킹할 여러 나라 사례들을 철저히 공부하고, 국민들의 지혜를 모은 뒤 ‘실학21’이란 최고 정책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새롭게 설계해 나간다. 그런데 현실 정치는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어지럽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울의 친구들과는 소식도 점차 끊어졌다. 젊은 시절 그렇게도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마저 소식 한 통 전해오지 않았다. 역관이었던 추사의 제자 이상적은 그런 추사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중국에 갈 때마다 최신의 서적들을 구해다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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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오전, 200여 년 전에는 무안 포구에서 몇 날 며칠이 걸려 도착한 흑산도를 목포에서 출발한 쾌속선은 두 시간여 만에 당도했다. ‘실학기행 2017’ 답사단 41명은 시공을 뛰어넘어 유배객의 심사를 헤아리며 꼬불꼬불 험난한 해안일주도로를 타고 섬 주변을 돌아봤다. 오지 중의 오지건만 크고 작은 무인도와 세월의 풍파로 일궈진 천혜의 자연 풍광은 처연한 외지인들 마음을 푸근하게 품어 주었다.
정약용의 명석함과 학문의 열성이 정조의 귀에 들어갔고 정조가 그를 불러 이야기를 나눠 보니 과연 출중하다고 느꼈음은 당연지사. 그래서 정조는 정약용에게 경연(임금이 학문을 닦기 위해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을 불러 강론을 하게 하는 일)을 맡겼다. 이가환은 이익의 손자로 이름난 실학자 중 한명이며 정약용은 이익이 지은 ‘성호사설’과 ‘곽우록’을 읽고 실학을 알게 돼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1780년 정약용은 과거시험을 봤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다음해에 다시 도전해 소과(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의 초시(1차 시험)와 본시에 합격해 진사로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어머니가 고산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였던 것이다. 서로 편지는 왕래했으나 얼굴은 보지 못하고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귀양이 풀리지 않은 상태로 죽고 말았다. 정약용은 오후 늦게 강진에 도착 했으나 천주교인이라는 죄도 아닌 죄목으로 유배를 왔으니 반겨주는 사람은커녕 모두 외면하고 모른 척 했다. 실학박물관에는 실학과 관련된 다양한 발명품과 전시품들이 있었다.
이제 막 고전을 접하기 시작하는 청소년과 정약용을 처음 읽는 독자들에게 더욱더 오래 사랑받는 입문서로 남기 위한 새 단장이다. 초판이 나온 1979년 이래 다산 정약용을 만나는 가장 친절한 통로 역할을 해온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창비)가 초판 발간 40주년을 기념해 새롭게 정비된 모습으로 출간됐다. 정약용의 거중기에 사용된 복합 도르래 장치에서 착안한 현대 오토마타 작품이 있다. 이석연 작가의 복합형 풀리 오토마타 ‘나비의 꿈’이 바로 그것이다. 풀리, 즉 도르래는 홈이 파인 바퀴에 밧줄이나 벨트를 걸고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잡아당기는 기계장치를 지칭한다. 이 벼슬은 궁중의 경서와 역사의 기록, 문서를 관리하고 학문을 연구해 임금이 묻는 질문에 답하는 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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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어록 중 '동트기 전에 일어나라' '술에 취하면 하루가 가고 목민심서에 취하면 천년대계가 이루어 진다'는 글귀도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그의 방대한 저술은 경세유표, 목민심서, 마과회통, 흠흠신서, 아방강역고, 아언각비 등 경학(經學)집 232권, 경세학서(經世學書) 138권, 시문집과 기타 저술 260권 총492권이다. 전북 부안군 우동리 반계 유형원(1622~ 1673)의 ‘반계서당’은 17세기에 세계적 저술인 『반계수록(磻溪隨錄)』의 산실로 그 터가 풍기는 기개가 대단했다.
인식 능력은 개념 차원에서 '지각', '분별', '사고'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교육의 과정에서는 다양한 인식 능력을 종합적으로 발휘한다. 어른을 공경하는 행동을 익힌 학습자는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 모습을 본 경험과 접목시키는 '사고'를 하다가 그것이 예의에 어긋난 잘못임을 '분별'하고 곧장 마음의 천리를 '지각'해야, 몸소 실천하는 수준까지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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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다산을 기대했던 독자들은 내심 놀랄지도 모른다. 실제로 소설은 정약용의 저술 작업의 내용과 고충보다는 유배시절에 사랑했던 여인, 제자, 강진의 산야, 음식 등을 이야기하며 병풍 속의 수묵화처럼 펼쳐지고 있다.  korea blog  풍경 너머에서는 정약용의 깊은 내상들이 언뜻언뜻 아프게 다가온다. 작가가 정약용의 슬픈 노래, 즉 비가(悲歌)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정조는 기득권층인 노론을 견제하며 새로운 정치세력을 키워 개혁을 이루고자 했고, 정약용 같은 인재를 아꼈다.
© 하상윤지난달 23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지역농촌보도실습’을 수강하는 학생들은 김시업 실학박물관 관장의 설명을 들으며 다산유적지를 둘러봤다. 그런데 정약용 생가는 소박한 ‘초막’이 아니라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었다. 1925년 대홍수로 유실된 생가를 1975년 마당이 널찍한 20칸짜리 전통 한옥으로 복원한 탓이다. 맹자는 공자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자신의 학문적 목적으로 삼고, '천하 안정'을 실천적 과제로 삼았다.
윤재평 다산박물관장은 “유물구입위원회를 거쳐 구입 예정 유물로 확정하고, 감정평가위원회 심의 및 불법문화재 검증 절차 이후 소유권 이전 작업을 진행하게 된다”고 말했다. 다산의 ‘시대와의 불화’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했던 아이들을 차례대로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야 했습니다. 다산은 금슬 좋은 부인과 사이에 6남3녀를 뒀는데, 이 가운데 무려 4남2녀를 병으로 잃어야만 했습니다.
해배 후에도 저술에 전념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1836년 2월 세상을 떠나는데 그날이 공교롭게도 결혼 60주년인 회혼례 날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부엌에서 회혼례 음식을 준비하는데 방에서 곡소리가 났다고 한다. 그러니까 회혼례 상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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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생산적인 논쟁을 탈피하여 시대에 적합한 실용적 철학 관념으로 현실성과 자율성에 의한 새로운 학문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인간의지의 자율성과 실현 가능한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였다. 강진 만덕산 기슭 다산초당에서 18년간 그는 방대한 경전을 주석하고 《목민심서(牧民心書)》등의 경세론(經世論)을 저술하였다. 자연에 묻혀 초의선사(草衣禪師)와 교유하면서 예술의 꽃을 피워내기도 했다.

이러한 성실함을 바탕으로 ‘목민심서’등 정약용의 빛나는 저작들이 탄생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 사회는 고령사회로 진입했고 곧 초고령사회를 맞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사가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100세 인생 시대이다.

다산 정약용의 탈성리학적 실학의 대성


본 논문은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잡혀간 수은(睡隱) 강항(姜沆)의 충절정신과 일본에 전해준 조선의 유학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간양록(看羊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간양록』은 강항이 일본에 체류하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한 것인데, 이는 일본에 대한 올바른 정책을 펼치고 뒷날 전란이 있을 때 대비하도록 한 것이었다. 강항은 명종 22년에서 광해군 10년까지 생존하였던 인물이다. 정유재란 때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왜병에 잡힌 몸이 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압송된 이후, 조선 조정에 대한 충절과 의리를 지키면서 일본에 유학을 전수하였고, 특히 일본의 지식인들과 친교를 맺으며 일본의 여러 역사나 관제 등을 살펴보았다. 일본의 등원성와(藤原醒窩)와 적송광통(赤松廣通) 등은 강항에게 나아가 유학을 배운 최고 지식인이었다.

황상익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근대화 과정에서 중인(中人)이 이끈 잡학의 활동상을 연구하겠다는 의지가 생겼다”고 밝혔다. 고재득 전 성동구청장은 “다산의 정신을 더 널리 펼칠 수 있도록 다산연구소가 든든한 재정 지원 아래 조직을 탄탄히 해 활성화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200년 전 다산의 신념과 희망이 답사단의 귀갓길을 훈훈하게 덥혔다.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옮긴 뒤에는 못을 파고 물을 끌어 폭포를 만들고, 동쪽과 서쪽에 두 암자를 짓고 서적 천여 권을 쌓아 놓고 글을 지으며 스스로 즐겼다”는 기록이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에 나온다. 19일 오후 답사단이 찾은 다산초당은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번 개축해 다산 정신의 본모습을 흐려 놓은 티가 역력해 안쓰러웠다. 초당 오른쪽 바위에 다산이 직접 새긴 ‘정석(丁石)’이란 각자(刻字)만이 홀로 빛나고 있었다.
다산 선생은 그 당시의 사회가 너무나 썩고 부패해서 일초일목, 사람뿐만 아니라 초목까지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것에 다시 생기를 불어 넣고 살리려면 역시 학문을 통해서 할 수밖에 없다. 다산 선생께서 60대에 들어 돌아가실 때 까지 15년 정도는 스스로 호를 사암이라고 하셨어요. 유학의 흥기 시대는 중국의 봉건사회가 막 시작하는 매우 중요한 단계였다.